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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희 칼럼] 먼구름 한형석과 찾아야 할 ‘부산정신’

부산문화재단 ‘2020 한형석 문화축전’ 의미있는 성과
중국 교류 불발은 아쉬움… ‘평전’도 소략한 느낌
문화축전 매년 이어져 ‘휴먼 콘텐츠’ ‘부산정신’ 찾아야

#먼구름 문화축전

13~15일 부산문화재단이 펼친 ‘2020 한형석 문화축전’은 선생의 삶과 활동궤적을 콘텐츠로 복원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한형석 선생 탄생 110주년에 맞춰 부산문화재단은 선생의 평전과 창작 오페라, 유품 전시회, 세미나를 열어 선생의 실체에 다가가려 했다. ‘부산의 기억, 예술로 아로새긴 광복의 꿈’이란 주제를 걸고, 그간의 연구성과를 집약하고 과제를 캐내며 선생의 예술구국 정신을 선양하려 한 건 바람직한 시도였다. 창작 오페라 ‘그 이름 먼구름’은 2020년 부산문화재단 브랜드 콘텐츠 공모 선정작이다. 올해 한국광복군 창설 80주년이란 시의성도 행사를 뜻깊게 만들었다. 

13일 부산 중구 BNK 아트시네마에서 열린 ‘2020 한형석 문화축전'(사진: 논설주간 박창희).

선생이 좋아한 문구를 담은 ‘그냥 갈 수 없잖아’ 족자 기념품은 인기였다. 부산문화재단이 모처럼 할 일을 했다. 그동안 지역어른, 부산정신을 챙기라는 주문이 잇따랐던 터다. 한형석 축전을 계기로 매년 한 두분씩 지역인물 축전을 열어갔으면 한다.

그런데, 뭔가 허전했다. 잔치가 끝나자 따라온 이 아쉬움은 뭐란 말인가.

먼구름 한형석(1910~1996)은 한국독립운동사와 지역문화사에서 아주 독특한 존재다. 나이 여섯에 중국으로 간 그는 중국군과 광복군에서 작곡, 선전, 음악 교관으로 활동하며 항일투쟁을 벌였다. 1940년 중국 시안에서 항일 오페라 ‘아리랑’을 창작하고 초연해 화제를 낳았으며, 많은 항일·혁명군가를 작곡했다. 그가 만든 ‘압록강 행진곡’은 요즘도 불려지는 명곡이다. 또한 중국과 한국에 아동극단(극장)을 설립해 유년기 문화예술교육의 초석을 다졌다. 그는 탁월한 음악가였고, 연출가, 문화기획자, 사회운동가였다.

부산문화재단의 기획은 좋았다. 소설가인 문화재단 강동수 대표는 오래 전부터 입버릇처럼 ‘먼구름’(한형석의 호)을 되뇌었다. 부산이 챙겨야 할 인물 콘텐츠 1순위가 먼구름이란 것, 먼구름을 통해 부산문화, 부산정신을 다잡아 보겠다는 결의였다. 그 결의를 실행했다는 점에서 ‘한형석 문화축전’은 강 대표의 업적이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일이다.

#깊이 파고들지 못한 아쉬움

준비과정에서 닥친 코로나 팬데믹 상황은 문화축전의 복병이었다. 한형석과 연관된 중국 취재와 교류사업이 무산된 건, 문화축전을 김빠지게 한 요인이었다. 한형석은 젊은 황금시절 30여년을 중국에서 보냈다. 중국에는 한때 사랑한 여인(성악가 강엽)이 있었고, 시안, 상하이, 제남 등 곳곳에 그의 숨막히는 예술구국의 자취가 배어 있다. 아동극장 시절 중국의 제자는 물론 한형석(한유한) 연구자도 중국에 흩어져 있다. 차후에라도 중국 사업은 추진되길 희망한다.

독립운동가 한형석(사진:부산문화재단 제공).

코로나 상황을 염두에 두더라도, 한형석이란 인물을 더 깊이, 더 치열하게 파고들 수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한형석 연구의 빈틈을 채우고, 과제와 비전을 도출해 부산 정신의 사표를 세우려 했던 애초 기획 의도가 온전히 달성됐다고 보긴 어렵다. 

‘한형석 평전’(장경준 지음, 산지니)만 해도 그렇다. 평전은 신국판에 본문 135쪽, 부록(자료) 116쪽으로 구성됐는데, 우선 볼륨감이 떨어지고 소략하다는 느낌을 준다. 한형석은 삶 자체가 드라마틱 하거니와, 다방면의 선구적 활동을 펼쳤기에 논의하고 파고들 부분이 많다. 중국내 항일 독립운동의 세부 동선과 삶과 밀착한 실천적 교육철학, 공공예술 기획자로서의 활동, 사상가로서의 면모, 못다한 예술활동에 대한 고뇌, 나아가 한중교류라는 큰 틀에서의 접근 등 새롭게 읽고 크게 봐야 할 과제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한형석 세미나에서도 별 새로운 이야기는 접하기 어려웠다. 종전의 비슷한 평가를 반복하고, 앞서 했던 작업을 챙기는 차원의 얘기들이 대부분이었다. 한형석 연구는 지난 2006년 ‘먼구름 한형석의 생애와 독립운동’(부산근대역사관)이 발간된 이후, 2010년 한형석 탄생 100주년을 전후해 가극 ‘아리랑’이 재조명되는 등 상당부분 진척이 되었다. 2000년 중반엔 해양사학자 김재승의 ‘한형석 평전’ 미완성 초안이 나왔었고, 그후 지역언론(국제신문)의 시리즈도 있었다.

산지니에서 펴낸 ‘한형석 평전

#부산정신을 찾아서

그나마 세미나 끝자락에 이지훈 필로아트랩 대표가 던진 화두는 곰곰 음미할 만 했다. 동래 출신 한흥교-한형석 부자(父子)에게서 동래정신·부산정신의 맥을 찾자는 얘기였다. 이지훈 대표의 발표 요지는 이랬다.

“동래는 개방적이고 역동적인 상업 문화도시다. 조선시대 동래야류, 동래학춤, 그리고 왜관을 상대로 한 동래상인들의 활동, 동래기영회의 문화진작 활동 등은 역사창조도시 동래의 본모습이다. 이런 바탕 위에서 민족의식이 싹텄고, 의열단에 참가한 박차정 가문과 한흥교-한형석 부자의 독립운동이 전개됐다. 부친 한흥교(1885~1967)는 부산 최초의 서양의사로, 1911년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의 깃발을 꽂았다. 부친의 피를 이어 받은 한형석의 골수에는 ‘근대 동래정신’이 박혀 있다.”

독립운동가 한형석을 새롭게 읽는 동래 정신, 그것은 곧 부산 정신이 아닐텐가. 그것을 찾아내 부산 정신의 자양분, 지역문화의 동력으로 만드는 게 한형석이 갖는 현대적 의미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런 게 역사에서 얻는 지역담론이고 미래 비전이다.

#먼구름의 ‘나의 조국’

부산 서구 망양로의 광복회 부산지부 사무실에는 ‘獻身祖國’(헌신조국)이라 적힌 편액이 걸려 있다. 한형석의 글씨다. 조국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친다! 필체에 서권기(書卷氣)가 묻어난다. 꾹 찍힌 점 하나도 망치로 대못을 박은 듯 힘이 들어가 있다. ‘國’자는 사람 얼굴처럼 둥글게 표현했다. 온 민족이 하나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결기가 읽힌다.

한형석이 직접 쓴 ‘헌신조국’ 편액

한형석의 글씨는 흔히 ‘먼구름체’라 불린다. 그의 글씨는 임시수도기념관 사빈당 현판, 부산대 캠퍼스 안의 ‘이문회우(以文會友)’ 비, 대동병원 현판, 동래 금강공원 내 임진동래의총 충혼각의 주련, 부산민주공원 충혼탑비의 글, 낙동강변 이은상의 ‘낙동강’ 시비 글씨 등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글씨의 주조는 ‘애국’이다. 예술구국을 실천한 광복군 노병의 헌신이 뜨겁게 와닿는다. 철기 이범석 장군은 생전에 한형석의 글씨를 두고 “이채롭고 기수(奇秀)한 필법”이라 평가했다.

한형석은 가끔씩 ‘목 잘린 난초(斷頸蘭)’를 그렸다. 이에 대해 그는 “일제가 우리 민족을 노예로 삼고 민족정신을 유린한 과거의 비통한 혈사를 잊지 않기 위해”라고 술회한 적 있다.

한형석의 존재는 우리가 잊고 있던 조국(祖國)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오늘날 우리 조국은 그냥 던져진 게 아니다. 지키려는 독립투사들의 고뇌와 서원의 바탕 위에 쓰여진 혈사임을 잊어선 안 된다.

우리가 20세기 인물 한형석을 챙기는 것은 21세기 지역의 길, 나라의 길을 찾기 위함이다. 한형석 연구 조명 작업이 과거 지향이 아닌, 미래지향의 비전 찾기에 초점이 맞춰져야 할 이유다. 

부산정신이 없다고들 한다. 있어도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있는데도 보지 못하면 없는 것이다. 부산문화재단의 ‘2020 한형석 문화축전’을 통해 동래 정신과 부산 정신의 일단을 엿본 것은 그나마 값진 경험이다.  

부산문화재단의 할 일이 더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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